날마다 우리의 밥상을 책임지는 음식 재료들! 쌀부터 시작해 김치 만들 때 사용되는 배추와 무, 그리고 여러 가지 과일들까지! 우리가 이런 맛있는 음식들을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누군가의 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혹시 누군지 감이 오시나요?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농업 박사로 손꼽히는 ‘우장춘 박사님’ 이랍니다. 아마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 정확히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해요.
우장춘 박사님은 많은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박사님의 가족과도 관련된 일화도 유명한데요, 그분의 일화 먼저 살펴볼까요?
사실 우장춘 박사님의 아버지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친일파 ‘우범선’입니다. 그는 사건 이후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결국 옛 동료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일본에는 아들 우장춘과, 일본인인 그의 부인만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서는 조선인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조선 동포에게선 역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양국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장춘 박사의 가족(좌측이 아버지 우범선, 가운데가 어린 우장춘 박사)
일본 대학에 진학한 우장춘은 당시 조선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과목 중 ‘농업’을 선택하여 공부하게 됩니다. 1935년에는 ‘서로 다른 두 종은 교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라는 내용의 <<종의 합성>>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유전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우장춘이 그의 논문에 항상 한글 성을 사용하는 것이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한국은 우장춘에게 손을 내밀게 됩니다.
“여생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조국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1950.3.10. 연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을 위해, 자신의 그리고 아버지의 조국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약 8년간 한국 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일하며, 해방 이후에 식량난으로 허덕이던 한국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장춘은 쌀을 우리 토질에 맞도록 개량시켰고, 많은 과일 품종들을 수입하여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정착시켰으며, 생명력이 강한 꽃씨들을 많이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 맛있는 배추와 무, 제주도의 감귤, 강원도의 감자를 먹을 수 있는 것도 다 우장춘 박사님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농업 발전과 식량난 해방을 위해서 일하셨던 우장춘 박사님은 마침내 그의 조국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1959년에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들은 날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과일, 채소, 음식들이지만 그런 것들 또한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니, 감회가 새롭지 않나요?
적어도 오늘만큼은 많은 것들이 내 주변에 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작은 감사인사를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보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bs역사채널e : 우장춘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야촌이재훈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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