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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5월 1일 근로자의 날, 그리고 청년 전태일


51일은 근로자의 날, 즉 노동절입니다. 노동절은 188651일 미국 시카고에서 노동자들의 권리와 권익보장을 위한 파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노동절은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연대의식을 다지는 날로, 매년 51일 기념되고 있습니다. 지난 51일 또한 대학로에서 세계 노동절 대회가 열렸고, 수도권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 스스로의 인권과 권리를 외쳤습니다.




<51일 세계 노동절 대회, 대학로>

 

노동절을 맞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 역사적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전태일입니다. 1948년 생 전태일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봉제 노동자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며 분신 투쟁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전태일 영전 사진, 출처: 전태일기념사업회>

 

전태일은 1965 17세의 나이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 즉, 미싱사 보조로 취직했습니다.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일당 50원을 받았는데, 자신보다 더 어린 나이에 저임금으로 하루 16시간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8년 노동자의 대부분이 알지 못했던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됐고, 현실과 다른 법의 내용에 분개한 전태일이 이를 동료들에게 알림으로써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태일은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등 현 노동실태의 문제점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활동들은 사업주들의 탄압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는데요, 이에 굴하지 않고 삼동 친목회를 새롭게 조직하여 설문지, 진정서 제출 등 활동의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삼동 침목회의 활동은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았지만 정부의 약속 위반과 사업주들의 탄압으로 인해 노동 운동은 다시 한 번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이에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은 19701113일 ‘근로 기준법’을 고발하는 뜻으로 평화 시장 앞에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시위가 사업주들과 경찰의 방해로 진행되지 않자 전태일은 몸에 석유를 끼얹어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습니다. 노동운동이 정부의 방해에 부딪히자 분신하여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 동상, 청계천 6가 버들다리>

 

전태일의 죽음을 시작으로 침묵의 대상이었던 노동문제가 신문, 잡지, 학생과 노동자들의 항의의 목소리 속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노동을 하는 기계가 아님을 깨닫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노동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0165건이었던 노동 분규 사건은 전태일 죽음 이후인 1971년에는 1,656건으로 폭증하였죠.

 

<전태일, 청계천 6가 버들다리>

 

전태일은 한국 근현대사 속 노동운동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여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태일을 통해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되돌아볼 수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사회 노동 시장은 다양한 노동조합들이 생겨나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노동자들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전태일의 외침이 어제의 외침이 아니라, 오늘을 향한 외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