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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피어라 민주주의의 꽃, 김주열 열사와 4·19혁명


여러분은 故김주열 열사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 4·19 혁명에 관해 언급할  빠지지 않는 이름  자인데요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희생된  숭고한 넋은 3·15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실종되었습니다가족들과 친구들의 수색에도 행방을   없던 그는 4 11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는데요이에 분개한 마산 시민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수그러들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적인 정권 타도 투쟁으로 변화되면서 4·19 혁명의 불길로 번져가게 되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불씨가 되어 3·15 마산의거 이후 4 18 고려대에서 처음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다음날인 19일에는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일어나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며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경무대(청와대) 시위대가 향하자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인해 21명의 사망자를 비롯한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답니다.







이후 425일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 27 대학 교수단 300 명이 시국 선언문을 채택, 국회까지 행진하며 이승만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는데요, 시위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바로 다음 이승만 정권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 라는 하야 성명 발표 물러나게 됩니다. 시국선언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3·15 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누적된 부패의 부정과 횡포로써 민권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한 정부와 집권당은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그렇다면 4·19혁명 후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고 부통령 후보 이기붕 일가는 자살을 하였으며, 집권당인 자유당은 와르르 무너져 버렸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615, 의회중심의 정부형태인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29, 5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야당이던 민주당이 233 의석 175석을 차지하며 압승하게 됩니다.


 이후 민주당 정권 체제 819일에 장면이 국무총리에 당선되고 국회 선출로 4 대통령 윤보선이 당선되며 대한민국 1공화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죠.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민주 혁명으로써 한국 민주주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할 있겠는데요, 이처럼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앞선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얼마 20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죠. 이번에는 18, 19 총선 투표율보다는 높은 58%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 우리의 당연한 권리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인해 얻어진 갚진 결과입니다. 56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민주이념과 사회정의 실현 정신을 우리의 소중한 1표를 통해 이어갈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