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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민주는 사람이다.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 대해 사람이다!라고 정의하는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 6 9일에 개관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망, 상이, 유죄판결, 해직, 학사징계 등의 피해를 입은 13,365분에 대해 심사를 거쳐 9,840 건을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피해로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민주화운동 보상법의 제정을 통해 과거 독재 시기에 저질러진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위로와 보상, 권리구제를 수행하였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조성은 민주화 운동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뿐만 아니라 이들의 민주화 운동과 희생을 기억하고 기리는 묘역이자 기념공간의 기능을 통해 민주화 운동 정신계승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질문 1. 민주화 운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한눈에 있도록 통사표와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연표 형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사진, 설명, 영상을 통해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질문 2.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된 열사는?

기념공원은 136명을 안장할 묘역으로 현재 49명의 민주열사가 안장돼 있습니다.

중에서 91 5 투쟁의 시작점이 강경태 열사를 소개해 봅니다.




강경태 열사




[약력]

1972 서울 출생, 1991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1991 3 22 전경의 직격 최루탄에 안면 부상

1991 4 26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 집단구타로 사망


[민주화 운동 배경]

1991 5 투쟁의 배경에는 경기 후퇴로 인한 경제침체가 원인이 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탄압하였고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에 군대까지 투입했다.

1990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들인 이른바 3 합당을 통해 여대야소로 정권을 장악한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 핑계로 헌병들이 M16 소총을 지닌 시내 곳곳을 순찰하게 하였다.

당시 물가 인상과 등록금 인상이 이어지며 대중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불만과 분노가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기폭재가 되었다.


[91 5월투쟁 기억]

91 5월투쟁 이른바 백골단에 의해 강경대 타살 사건이 발생한 4 26일부터 강경대 타살규탄 집회를 시작으로 5~6 중순까지 발생한 규탄집회와 항의, 분신으로 이어진 대중투쟁이다.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2,300 회의 집회가 열렸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의 시위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과정에서, 유서대필공방을 초래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분신, 한진 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와 강경진압으로 인한 김귀정 학생의 죽음까지 학생, 빈민, 노동자 모두 13명이 사망하였다.



 




91 5 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와 민주적 개혁 지연에 대한 국민들의 잠재된 불만이 일시에 폭발적으로 분출한 전국적 규모의 대중투쟁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많은 희생을 수반하였다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가 실현되는 민주사회, 모두가 평등한 사회, 통일과 평화의 사회를 이루려 했던 열사들, 민주주의를 위하여, 모든 사람의 평등을 위하여, 인간의 가치를 위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신념과 소신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열사들을 위해 작은 촛불 하나를 들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