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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자신의 나라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박사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계실 테지만, 그 중 자신의 조국이 아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외국인 독립운동가도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모르실 것 같습니다!





광복 71주년을 맞은 올 해, 조선의 독립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푸른눈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머트에 대해서 우리 함께 알아볼까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미국 동복부의 버몬트 주 출신인 헐버트 박사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1886년 근대식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육영공원의 축소 운영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2년 뒤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때부터 고종의 정지척, 외교적, 문화적 자문위원이 된 헐버트 박사.

국권이 침탈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미국 백악관을 방문하거나, <한국평론> 발간을 통해 일본의 탄압을 폭로하는 등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 선생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면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최초도 도입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고종에게 헐버트는 헤이그 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헤이그 특사가 네덜란드에 파견하기 전 헐버트는 미리 네덜란드에 도착하여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고 해요!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일본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겠죠?

결국 헐버트는 네덜란드에서 다시는 조선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끊임없이 일본의 잔인함을 국제사회에 고발했다고 합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안정을 찾은 우리의 대한민국은 헐버트응 국빈으로 초대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 86. 하지만 건강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땅을 밞을 것을 결심했고 1949719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일주일 뒤 85일 결국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유언은 한국 땅에 묻어 달라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했는지 느껴지지 않나요?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헐버트 박사는 양화진 외국인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뜨거운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헐버트 박사.

광복 71주년을 맞아 헐버트 박사를 한번 더 떠올리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