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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요즘 대한민국은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영화 덕혜옹주 뜨겁습니다.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덕혜옹주의 .

많이들 알고 계신가요? 영화를 보기 덕혜옹주의 삶을 잠시 들여다 볼까요?





덕수궁 석조전의 황실 가족사진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황녀로 고종이 60세이 얻은 귀한 딸이었습니다.

국권상실 직후 슬픈 분위기 덕혜옹주의 탄생은 대한제국의 희망이자 고종의 유일한 행복이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는 일본의 견제 때문에 황적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한 덕혜옹주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어주는 등의 지극한 사랑을 보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황적에 이름을 올릴 있게 되었지만, 당시 대한제국 황족은 대부분 일본으로 끌려가 인질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걱정했던 고종은 덕혜옹주가 8살이 되던 해에 황실 시종이었던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키려 했으나 그마저도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고종이 1919 사망하자 일본은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덕혜옹주가 14살이 되던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1931 덕혜옹주는 대마도 백작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고, 일본인 아내를 맞이한 영친왕과 같은 운명을 밟게 사실에 조선의 백성들은 분노했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일본 정부의 강압으로 결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꽤나 아꼈으며, 결혼 1 정혜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망국의 옹주로서 겪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워낙 컷던 탓에 덕혜옹주가 앓고 있던 신경쇠약은 점차 병세가 심해졌고, 다케유키는 주변의 시선탓에 덕혜옹주를 집에 감금한 치료를 했습니다. 사이 태평양 전쟁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군정의 화족 축소 계획에 따라 다케유키는 화족에서 제외 됐고, 귀족으로서 특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에 생계유지의 곤란을 겼었던 다케유키는 이상 덕혜옹주를 감당 없다고 판단하여 1946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 10년이 흐른 1955 덕혜옹주는 남편과의 이혼과 하나뿐인 딸이 자살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상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 괴로웠던 덕혜옹주는 귀국을 희망했지만, 정치권이 옹주의 귀국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광복한지 17년이 지나고서야 그리운 고국에 돌아올 있었습니다. 이후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머물다 1989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태어난 자체가 황실의 기쁨이자 희망이었던 덕혜옹주는 시대의 아픔과 역사의 혼돈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영화로 다시 태어난 대한제국의 황녀 덕혜옹주, 이번 주말 영화 덕혜옹주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