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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광복군 창설 76주년>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오는 9 17일은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76주년이 되는 날인데요. 지난 1940 중국 충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광복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식전을 마친 기념 사진 (출처: 한중문화협회)

 

1919 대한민국육군 임시군제를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에 따라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는데요. 이와 함께 1919 상하이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지만, 지역적 차이와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한국광복군의 창설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윤봉길 선생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자, 김구 선생은 1934년에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는데요. 또한, 중국의 중앙육군 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키는 한국광복군 설립을 위한 군사 인재 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으로 확대되면서 피난처를 옮겨 다니는 상황으로 인해 시기에도 한국광복군 창설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훈련하는 광복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훈련을 마친 2 지대 대원들이 과업완수를 위해 선서하는 모습 (출처: 한중문화협회)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었던 한국광복군의 창설, 비로소 1940 9 17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 우리의 꿈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이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게 되는데요. 그의 단호하고도 묵직한 말에서, 우리는 자주독립을 향한 의지를 느낄 있었습니다.

 

광복군은 ·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광복군창설에 이어 이들은 병력 모집을 위한 기구인 5개의 징병 모집 분처를 설치하여, 산서성·수원성·절강성·안휘성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는데요.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있었다고 하네요!





1941 3 6 광복군 징모 3분처 위원들의 환송 기념 사진 (출처: 동아일보사)

 

한국광복군 창설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은 쉽지만은 않았는데요. 중국 측이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한국광복군 행동 9 준칙 요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당 준칙에는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 광복군은 한국이나 한국 변경에 근접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반드시 중국군과 연합해서 행동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광복군의 중국 군사 훈련은 해당 지역의 중국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한하는 항목들이 많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한국광복군의 사기가 중국에 위협적이었다는 뜻이겠죠?

 

김구 선생은 승전국의 위치에서 독립을 주장해야만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을 있다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이유로 그는 당시 미국군의 책임자와 함께 공동으로 군사 작전을 협의하고, 수년간 훈련받은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 진공작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취소되어 무산되고 말았는데요. 김구 선생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것도 허사이다라고 말하며, 일본의 항복을 개탄하였다고 합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꿈꾸며 탄생한 한국광복군은 1946 6, 강제 해체되는 절차를 밟으면서 막을 내리게 되는데요. 비록 그들의 꿈이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던 그들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