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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뼈아픈 역사, 380일 간의 아관파천


2017년은 정유년이죠. 120 정유년인 1897 10,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선포합니다. 외세에 대항하며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세우겠다는 의지였죠.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배경은 수없이 많지만,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던 것은 바로 아관파천시기였습니다.


아관파천은 1896 2, 고종이 세자 등과 함께 아관(러시아 공관)으로 파천(임금이 거처를 옮김)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 러시아공사관은 덕수궁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지금의 정동공원이 위치한 곳으로, 고종이 머물던 경복궁과도 멀지 않았던 곳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단순히 거처를 옮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외세의 세력에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기 때문이지요.



<고종황제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종은 12살에 왕위에 오른 탓에 아버지인 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만 했는데요. 문을 닫아걸고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던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기반으로 고종이 성인이 이후까지 섭정을 이어갔습니다.

 

고종은 이에 대원군의 쇄국과 반대되는 개항으로 나라를 바꾸려 했습니다. 1876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문호가 개방되었고, 유교적 이념에 따라 살아가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의 물결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란을 느낀 것은 국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혼돈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내각 대신들은 각각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일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불공정한 개항으로 인한 민중의 반란과 갑오개혁의 실패 등으로 인한 내각의 흔들림!

 

그러던 1895 10, 궁의 깊숙한 곳에서 을미사변이 벌어집니다. 청에 의지하려는 명성황후를 일본의 낭인들이 시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인데요. 어느 곳보다 안전하리라 믿었던 궁궐에서 벌어진 일은 국민은 물론, 고종 황제까지도 충격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의해 자신 또한 목숨이 위태로울 있다는 것을 직감한 고종은 열강의 힘에 기대기로 합니다.

 

일본도 아니고 청도 아닌 나라, 바로 러시아였습니다.

 

1896 2 11 새벽, 어둠을 틈타 궁을 빠져나온 고종은 궁녀의 가마를 아관으로 향합니다. 의심을 피하고자 궁녀의 가마를 것은 오랫동안 준비됐던 계획의 일부였는데요. 고종을 곁에서 모시던 상궁이 미리 가마를 타고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며 가마가 나가더라도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해두었던 것입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 현재 모습 / 출처 : 두산백과>



계획대로 아관으로 옮겨간 고종은 이듬해 2 20일까지 380 일을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렀습니다. 아관파천을 치욕의 역사로 기억하기도 하지만, 시기 고종은 대한제국을 구상했으며 러시아 니콜라이 2세로부터 군사와 재정 고문을 받았습니다. 또한, 일본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서재필을 필두로 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의 독립운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고종황제와 내각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하지만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던 러시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정부에 대한 간섭 또한 커졌습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공관을 떠나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옵니다.

환궁한 고종은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높이고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며 자주독립 국가임을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아관파천은 뼈아픈 과거이지만, 기억해야 우리의 역사일 것입니다. 얼마 기사에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일본의 눈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복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복원을 통해 고종의 삶을 이해하는 역사적 자료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