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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민주시민 혁명의 시초 4·19혁명

‘대한민국’ 초창기에 있었던 그 극심한 혼란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지나야 할 진통과도 같았습니다. 아기가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걸음마를 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이번 포스팅에서 이야기할 4∙19 혁명도 그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19혁명 당시 모습(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국민방위군사건,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등 이승만 정권의 비 민주적인 정치행태로 민심을 잃은 자유당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크게 패배하지요. 1948년 이후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젊은 세대가 유권자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권위주의 정치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정치적 위협을 느낀 자유당의 강경 세력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사상 유례없는 불법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합니다. 득표수 조작, 투표함 바꿔치기, 3인조 또는 5인조에 의한 반 공개투표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납니다. 시민들도 합세하여 동참했죠. 이때 경찰은 군중에 무차별 발포를 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강제적인 진압을 했습니다. 마산 시민들이 격분한 와중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바다에 떠올라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자유당 정권은 마산 항쟁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고 발표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강제 진압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진상이 밝혀져 공분을 사게 되지요. 


▲ 고려대학교 4·18기념관



그리고 4월 18일 서울의 고려대생 3,000여 명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합니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한들의 습격으로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지요. 이에 각지의 대학생들과 고등학생 3만여 명이 거리로 나와 4월 19일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서울은 무정부 상태로 변했고, 독재 규탄과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열망에 당황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진주시킵니다.


1960년 4월 25일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의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현재 구속되어있는 학생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학생, 시민들의 시위에 동참합니다.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 시위 군중들은 그 다음날인 26일까지 열렬한 규탄시위를 벌이지요.

 

▲1960년 4월 25일 교수단 시위의 출발 지점이었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마침내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주선하에 시민, 학생 대표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이 이루어집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이기붕의 퇴진’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지요. 이틀 뒤인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자살,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극비리에 미국으로 떠납니다. 이렇게 직접 민중이 주체가 되어 정권을 뒤집었던 것이 바로 4·19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4·19 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이일영 전 국회의원은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 ‘정규재TV’에서 “4·19는 어떤 조직적인 형태라기보단 독재, 권위주의 정치에 저항해 자유 민주주의, 남북통일이란 기치 아래 이뤄졌던 혁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본적인 권리 하나하나가 수많은 노력 과 희생 끝에 얻어진 것이지요. 우리나라 국민이 정말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그 가치를 이어받아 더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