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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환상의 한일합작 드라마 <여인들의 타국>

 

한국을 대표하는 사극 작가, 신봉승 작가를 알게 된 것은 MBC 드라마 <허준>과 <대장금>으로 유명한 이병훈 감독의 책 「꿈의 왕국을 세워라」를 읽었을 때였습니다. 드라마 <허준>으로 한국 사극의 새 시대를 연 이병훈 감독은, 그 전에 MBC 드라마 <조선 왕조 500년>이라는 사극 시리즈를 1983부터 1990년까지 8년에 걸쳐 연출했는데, 그 때 각본을 담당한 작가가 신봉승 작가였다고 해요.  이병훈 감독은 신봉승 작가를 ‘살아 있는 역사’, ‘걸어 다니는 역사책’ 이라고 부르며 역사에 해박하고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병훈 감독의 책 「꿈의 왕국을 세워라」와 그가 연출한 MBC 드라마 <허준>, <대장금>



 

그래서 신봉승 작가가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외에 어떤 작품을 썼는지 찾아 봤더니, 놀랍게도 일본에 관련되는 드라마를 많이 썼더군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납치돼 일본 큐슈에서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만들어 낸 조선인 도공, 심수관을 주인공으로 한 <타국>(MBC, 1978년 방영), 15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도모한 재일교포의 일기를 바탕으로 일본의 사회문제를 부각시킨 <유미의 일기>(KBS, 1981년 방영) 등 한일 역사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에 주목해 드라마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놀란 것은 1980년 한일합작으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인들의 타국> 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인데요, 그 이름 대로 임진왜란 때 이국으로 가게 된 일본과 조선 여성의 시각에서 전란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지금이야 한일합작 방송물이 드물지 않지만,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그것이 하나의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한일 합작 드라마라고 했을 때 일본사람이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해에 방영된 <프렌즈>(MBC)일 것입니다. 한국 배우 원빈과 일본 배우 후카다 쿄코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였는데, 아직 ‘한류’라는 말도 없을 때였고 주연으로 나온 원빈도 일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일본인 소녀와 한국인 청년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는 많은 일본 여성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한류의 싹은 그 때 뿌려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MBC  한일합작 드라마 「프렌즈」


 

그러나 신봉승 작가는 이보다 20년이나 앞서 한일 합작 드라마를 만들었죠.  드라마 <프렌즈>는 한일 월드컵이라는 축제 속에 만들어 진 것이지만, <여인들의 타국>은 신봉승이라는 한 개인의 집념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죠. 그만큼 드라마가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은 마치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하더라고요.

60년대 초반부터 일본과 교류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신 작가는 일본에서 간행된 영화잡지나 시나리오 잡지를 읽으면서 한일 교류를 같이 실현해 나갈 일본인 파트너를 찾았습니다. 그런 신 작가가 선택한 사람이 일본 시나리오 작가, 야마다 노부오(山田信夫, 1932∼1998)씨 였습니다.


개인의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당시 국내 상황 속에서 어렵게 일본으로 건너간 신 작가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야마다 씨한테 전화를 했는데, 그 때 아마다 씨의 응답이 재미있습니다.


"북에서 오셨습니까? 남에서 오셨습니까?"

 "남에서 왔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당시 일본에서의 한국 이미지는 어둡고 무서운 ‘군사독재국가’ 였고, 북한은 재일교포들의 북한귀국사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 낙원’이라는 선전 속에 긍정적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때 야마다 씨는 신 작가를 KCIA(한국 중앙 정보부, 국가 정보원의 옛 이름) 요원으로 착각했었다고 하네요.


더 이상 말을 건낼 틈도 안 주는 태도에 신 작가는 굴욕감마저 느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태도나 정신이 자신과 같다라는 확신이 있어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 후에도 신 작가는 몇 번이나 일본에 가서 야마다 씨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그때마다 야마다 씨는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신 작가는 후배한테서 받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서울의 한 호텔에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야마다 노부오 씨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일 시나리오 작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이야기를 했고 그로부터 1년 후, 각각 한국의 MBC와 일본의 요미우리(讀賣) TV를 설득해 한일합작 드라마 제작에 매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선택한 주제는 ‘임진왜란’. 하지만 전쟁의 주인공은 무장들이 아니고, 이국 땅에 가게 된 일본과 조선의 두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시각에서 임진왜란을 그렸습니다.

 

▲34년 전 한일합작 드라마 「여인들의 타국」


 

배우와 스탭은 모두 양국 톱 클래스가 모였습니다. 

각본 : 신봉승, 야마다 노부오(山田信夫)

연출 : 표재순, 데메 마사노부(出目昌伸)

출연 : 이정길, 김영란, 최불암, 고두심, 세키네 게이코(關根惠子), 가쓰노 히로시(勝野洋) 등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촬영을 하고 한일 동시에 방송할 예정이었지만 방송 직전에 한국 쪽에서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일본인 배우의 출연이 문제가 된 것이죠. 

 

결국 일본에서만 1980년 11월 6일 오후 9시 ‘목요일 골든 드라마’ 시간대에 방송되었고, 한국에서는 끝내 방송을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에서는 25%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요, 방송 후 ‘한국 농촌이 그토록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한복 치마 저고리가 정말로 예쁘다’ 등 감탄의 목소리가 많이 나왔습니다. 또, 드라마의 주제가로 사용된 ‘한 오백 년’ 노래를 궁금해하는 문의 전화가 방송국에 빗발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을 살해하고 조선인의 귀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져간 사실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그대로 드라마에 넣기 위해 신 선생님이 삭제를 요구하는 일본측과 웃통을 벗고 싸웠고, 이것을 드라마를 통해 본 일본 사람들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 부끄럽다’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일 합작드라마 <여인들의 타국> 이후 3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당시보다 훨씬 가까워 졌지만, 요즘 국민 사이에는 또 다른 벽이 생기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번 <여인들의 타국>을 한일 동시방송하고, 우리들이 극복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은 때입니다.




*본 글은 한걸음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