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걸음기자단 History

밥그릇에 대하여

밥그릇에 대하여

 

우리 일상생활에서 쉽게 보며, 언제나 사용하고 있는 밥그릇에 대해 시대별 생활 속 변천사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밥그릇은 과연 현재의 밥그릇과 같을까요? 밥그릇 기준량보다 훨씬 큰 사발 같은 그릇에 밥을 먹었다면 믿어지시나요? 우리가 잘 모르는 밥그릇의 기준량을 한번 다뤄봤습니다.

 

 

1890년대 조선풍습 사진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1리터 이상의 밥 먹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밥그릇 크기의 기준은 190ml으로, 이것도 크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이 계실겁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밥을 적게 먹거나 간혹 일부러 한 끼를 굶곤 하는데요, 조선시대는 24시간 기준으로 2끼 이상의 엄청난 양을 먹었다고 합니다.

 

밥심으로 산다고 할 만큼 우리 조상은 많은 양의 밥을 먹었습니다. 조선후기 기록 보면 당시 남자 어른의 한 끼 밥 양이 무려 1260ml, 1.2L나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끼에 1.2L가 가능해?‘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하루 두 끼가 보통이었던 것을 감안하고 또 다른 반찬이 별로 없고 간식이 부족했으니 밥을 대량 섭취한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밥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밥을 짓는 기술은 예술의 경지로 발달했고 이 역시 주변국에 소문이 납니다. 중국 청나라 때 장영이라는 학자는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라며 한민족의 밥 짓기 솜씨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또한 밥을 맛보고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등 어떤 나무 장작을 사용했는지 맞히기도 했다고 하니 밥 짓는 솜씨뿐 아니라 밥맛을 감정하는 미각도 오늘날 맛을 감정하는 사람보다 더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밥심의 힘으로 버텼다?

 

   

조선시대 밥그릇 (출처:국립민속박물관)

 

한 때 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제패한 원동력은 ‘밥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질 만큼 우리 민족의 ‘밥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쇄미록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현재 우리가 먹는 밥 한공기의 5배 되는 양을 먹었다고 합니다.

 

왜 그토록 밥을 많이 먹었을까?

 

   

조선시대 밥그릇 (출처:국립민속박물관)

 

밥을 유난히 대식가이상으로 섭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조선말 한국에 머문 다블뤼 주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사람들이 먹는 먹거리는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 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 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자제를 못하고 먹는 일명 머슴밥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리터만한 쌀밥을 먹고도 더 먹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밥을 많이 먹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어려우나 가난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조선 사회가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밥그릇 용량이 당시보다 매우 작은 이유는 다양한 음식과 고기류 반찬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밥만 먹는 밥그릇의 용량이 줄어든 것입니다. 현재에도 반찬들이 빈약했다면 아마도 쌀밥의 양이 1리터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많은 밥을 먹었을 지도 모릅니다.

 

    

조선시대 밥그릇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선조들의 식생활, 쌀밥의 양, 밥그릇의 변천사를 보면서 당시 절대빈곤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고 쌀밥을 먹는 양이 1L터나 되도 식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쌀밥만이 아닌 다양한 음식과 먹거리들이 다양해 진 것에 감사해야겠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