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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다


 “1969년 2긴급한 회의가 있어 로마에 갔다가 미국을 거쳐 3월 27일쯤 일본에 도착했다…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하룻밤 신세를 졌던 작은자매회 수녀원에서 막 나오려는데한 수녀가 대주교님전화 왔어요’ 하며 나를 멈춰 세웠다… 전날 찾아뵌 은사 게페르트 신부님이었다. ‘김 대주교축하해요!’ ‘축하라뇨오늘 제 생일도 아닌데 무슨 축하입니까?’ ‘김 대주교가 추기경이 됐어요교황님이 당신을 추기경에 임명하셨습니다.’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발췌 - 


 

지난 2009216일 오후 6..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긴 채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자락을 장식한 한 분의 추기경이 선종하셨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살던 시기의 대한민국은 무척이나 격동적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의 생활부터 군사정권까지 정말 수많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사건들 속에는 언제나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회고록 도서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이 걸어온 대한민국 역사의 현장을 함께 살펴볼까요?^^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72,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는데, 김수환의 조부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고, 아버지 역시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 동안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라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의 유학, 그리고 학도병


김수환은 신학생으로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신학생들은 로마로 유학을 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로마로 유학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에 한국의 주교들은 신학생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 상지대학에서 2년간 독일어를 공부하던 도중, 평생의 영적 스승으로 따르게 되는 독일의 게페르트 신부님(이 신부님은 훗날 한국으로 건너가 서강대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을 만나게 되어 사제의 길에 대한 조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편, 김수환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당시의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 치열해지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강제로 받게 할 정도로 전시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요. 결국 학병지원에 대한 압박을 받게 되자, 군사훈련을 열심히 받아 동포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군으로 합류할 작전까지 세웠지만, 모두 허사가 되어버리고 결국 1944년 학병으로 입대했습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자 김수환 역시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469월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최연소 추기경, 그리고 철권 통치에 대한 비판


안동성당에서 첫 사목생활을 시작한 김수환은 1966년 천주교 마산교구장, 1968년 서울대교구 대주교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9328,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나이는 47!!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습니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의 철권통치와 전두환 대통령의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1971, 성탄 미사에서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은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평화에 해를 주는 것이다.”는 말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1972,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되자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결국 지학순 주교를 구해내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의 군사정권 출범 때도,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다.”12.12사태를 크게 비판하였으며,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을 투입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엔 신부들이, 그 뒤엔 수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위대를 지켜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군사정권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해임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교황청은 당연히 무시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교황은 폴란드에서 공산당 독재에 맞서 싸운 경력이 있는 요한 바오로 2였기에, 그러한 요구들은 무척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수환이 말하는 바보야


2007, 85세의 혜화동 할아버지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며 바보야라는 문구를 남겼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나 대접 받길 원하는 게 바보.” 라며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바보야>

(2013/ 강성옥 감독) 포스터

 

 

'스스로의 자만을 항상 경계하고, 자신을 항상 낮추는 자세로 세상을 살라'는 의미가 담긴 하나의 자화상을 그리며, 김수환 추기경은 또 다시 우리에게 한가지 큰 교훈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9, 강남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노환으로 인해 선종하였습니다. 향년 87세였습니다. 전국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한 조문행렬이 이어졌으며, 바티칸에서도 특별히 교황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 미사 [출처-공공누리]

 

불의를 보면 언제나 참지 못하는 열혈 추기경임과 동시에, 약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던 혜화동 할아버지 김수환 추기경!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많은 교훈과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 속 한 켠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본 글은 한걸음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