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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그림으로 남은 인생, 서양화가 이중섭 (1916 – 1956)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림으로 남다

이중섭 (1916 1956)

 

방학 때가 되면 해외의 유명한 그림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올해에도 <오르세 미술관전>이나 <20세기 위대한 화가들>과 같은 전시회가 열려 고흐, 르누아르, 모네, 세잔 등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우리에게도 이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의 명성에 못지않은 위대한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 이중섭입니다. 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은 오늘로부터 58년 전인 195696,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소 그림을 그리다 소도둑으로 몰리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특출났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재능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면서 꽃피기 시작했지요. 평양고등보통학교 대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중섭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한 임용련 선생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하게 됩니다. 임 선생님은 습작을 특히 강조했는데 천재이자 노력파였던 이중섭은 스승의 말대로 습작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들판의 소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릴 뻔한 적도 있다고 해요.

 

이중섭은 1935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곧 그만두고 일본 미술계에서 전위적인 분위기를 주도했던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로 옮겨 미술공부를 이어갑니다. 이곳에서 이중섭은 유럽의 야수파 작가들처럼 자유롭고 강렬한 조형성을 선보이는데요, 이때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요.


<흰 소> 합판에 유채,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다!

 

이중섭의 재능은 일본 유학시절 자유미술가협회(일본 추상미술의 중심그룹)’의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수상을 하면서 드러납니다. 그는 일본 유학파 미술가들과 함께 결성한 조선신미술가협회에서 한국인 특유의 민족적인 미의식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고, 1943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작품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945년 결혼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이중섭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제주도로 피난을 다녔지만 1952년 생활고에 못 견딘 아내 마사코가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버리며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이중섭은 1953년 도쿄에서 단 5일간의 만남을 끝으로 가족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 가족, 그리움.... 그리고 그리다!

 

고통은 작가에게는 걸작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가족과의 이별과 전쟁의 참담함을 홀로 겪던 이 시기에 이중섭 생애의 걸작이 쏟아집니다.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부두노동자로 일할 때는 그림 그릴 재료가 없어서 양담배갑을 모아 그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고,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갈 때 그의 대표작 연작과 부부그림이 탄생을 했습니다. 작고 버려진 종이에라도 아픔과 그리움을 그려 담았던 이중섭은 수채화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200여 점과 은종이그림 300여점 등 수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이들> 은지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지만 늘어나는 작품 수와 달리 그의 수명은 짧아져갔습니다. 이중섭은 술에 의지를 하게 되었고, 결국 195696일 간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한국전쟁의 아픈 시기를 살다 간 비운의 천재 이중섭. 그는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그림에 담았던 시대의 아픔,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림에 대한 정열은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에 남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