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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민족혼을 노래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민족혼을 노래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올 여름 개봉한 영화 <명량>이 17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천만관객을 넘은 한국영화가 벌써 10편이나 됩니다.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소위 ‘대박 영화’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는데요,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이 바로 당시의 ‘국민영화’였지요.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갖춘 영화 <아리랑>은, 각본, 감독을 모두 해낸 천재감독 나운규를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었는데요, 10월 1일 영화<아리랑> 개봉 88주년을 맞아 <아리랑>과 나운규 감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배우? 감독? 요절한 천재 감독 나운규


▲나운규 사진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 되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간도 땅에서 대한민국독립 만세를 외칠 정도로 강단 있던 그는 러시아 백군의 용병생활과 독립군 활동까지 하던 애국지사였습니다. 독립활동에 매진하던 그가 영화를 알게 된 것은 192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부터입니다.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우미관에서 ‘명금’, ‘쾌걸 조로’, ‘철로의 백장미’ 등의 작품을 본 그는 곧바로 영화라는 예술에 눈을 뜨게 됩니다.

 

1924년 나운규는 당시 영화 제작의 메카였던 ‘조선 키네마’사(社)에 들어갑니다. 윤백남 감독의 영화 <운영전>에서 가마꾼으로 출연한 그는 다음 작품 <농중조>에서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불과 3년 만에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아리랑>을 선보였습니다. 독립투사로 활동했던 그의 항일민족정신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이 작품에서 그는 직접 각본과 감독, 주연까지 맡으며 예술적 재능에 꽃을 피운 것이죠. 1937년 8월 9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으로 떠나기까지 <벙어리 삼룡>, <임자 없는 나룻배>, <오몽녀> 등의 굵직한 작품을 남긴 그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의 선구자이자 교과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항일영화 <아리랑>, 예술로 대한독립을 외치다

 

이제 영화 <아리랑>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무성영화 <아리랑>은 총 9권으로 이뤄져있는데요, 주인공 광인, 즉 미친 사람입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광인이 된 주인공 영진은, 악질 지주의 수족 노릇을 하며 자신의 누이마저 겁탈하려고 한 오기호에게 낫을 휘두르게 됩니다. 일본인 순경에게 붙잡혀 포승에 묶인 채 아리랑 고개를 넘는 주인공과 그 뒤로 흐르던 주제가 ‘신아리랑’. 이 장면에서 관객들 함께 울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불의에 항거하다 끌려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당시 억압받고 있던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영화 아리랑 장면 (출처 : KBS 한국의 유산 방송 화면 캡처)

 

 

민족 영화, 창작의 초석이 되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이 개봉되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개화기 신파물이나 외국영화 번안모방물 수준이던 당시 상영작들 중에서 <아리랑>은 단연 돋보이는 예술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리랑>은 항일민족정신이라는 칼날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연기와 음악, 연출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갖춘 창작물이었습니다. 당시 입소문을 타고 전국 곳곳의 극장을 돌며 개봉된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큰 성공을 하게 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영화계는 기존의 신파물이나 외국 모방물을 개봉하는 수준을 벗어나 우리네 삶을 반영한 영화 제작을 시작하게 되지요.

 

<아리랑> 영화가 개봉한지 어언 90여 년. 아직까지도 한국영화를 이야기 할 때 영화 <아리랑>은 빠지지 않습니다. 36살의 짧지만 불꽃같았던 청년 나운규의 예술혼이 만들어낸 민족 영화 <아리랑>은 세월이 흘러도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