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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근대문물의 시작 우표발행과 우편업무의 시작

근대문물의 시작 

우표발행과 우편업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가 붙은 편지봉투를 받아본지 얼마나 되었나요? 요즘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터넷 이메일 계정으로 소식을 확인하거나 화상 채팅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안부를 묻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나라 우정총국이 국내 최초로 우표를 발행하고 우편업무를 시작한 (1884년)11월 18일을 맞아 우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근대문물의 물꼬를 튼 우정총국의 설립

 

우리나라 우편의 역사를 알아보려면 이 사람, 홍영식을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우체국이 첫발을 내딛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인데요, 그는 개화기 때 근대화에 앞장선 개화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조선이 강한 나라가 되려면 외국의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고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개화파들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워오도록 했습니다.


 

▲ 홍영식(출처: 우정사업본부 홈페이지)

 

그때 일본에 간 홍영식은 일본의 우체국과 우표 제도를 보고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발 빠르게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빠른 정보와 소식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지요. 또한 우표를 발행하여 판매하면 나라 살림에도 큰 보탬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미국의 우편제도까지 배워온 홍영식은 귀국 후 고종에게 우체국 설립을 적극적으로 건의합니다. 드디어 1884년 4월 22일, 홍영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 ‘우정총국’을 세우고 총 책임자가 됩니다. 그리도 다시 수 개 월의 준비 끝에 11월 18일 서울 - 인천 간 우편업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정총국의 설립은 갑신정변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개화파는 당시 정권을 잡고있던 명성화후 세력과 수구파들을 몰아내고자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을 기념하는 만찬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청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실패하게 되죠. 이때 청나라 병사에 의해 홍영식은 목숨을 잃게 되고, 우정총국은 개국한지 20 여일 만에 문을 닫고 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문위우표’

 

우정총국의 개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발행되었는데요, 최초의 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이라 불리는 ‘문위우표’ 5종이었습니다. 당시 화폐 단위인 ‘문’으로 표시해 발행한 이 우표는 인쇄기술이 없어 일본에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중 5문과 10문의 우표만 예정대로 발행되었는데요, 25문, 50문, 100문이 발행되지 못한 이유는 인쇄된 우표가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정총국이 문을 닫은 후에 도착했기 때문이죠.



▲ 국내 최초의 우표 ‘문위우표’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4년 현재 ‘대한민국 우표’ 값은 규격봉투를 기준으로 300원입니다. 전국 어디든 하루 이틀 만에 소식을 전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직접 부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답장을 기다려야하는 수고로움 때문인지 편지를 부치는 사람은 많이 사라졌는데요,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이 겨울만이라도 한 자 한 자 손으로 써내려간 편지로 따뜻한 마음을 전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