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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 의사가 독립투쟁을 위해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며 남긴 일곱 글자

 

 

 

올해는 일제에 맞서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 준 윤봉길 의사 의거 8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일(4월 29일)에 맞춰 중국 상해에서는 '매헌윤봉길기념관'을 재개관하고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식을 여는 등 각종 행사가 이어졌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25세에 청춘을 조국에 바친 조선 청년, 윤봉길 의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출처: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는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야학당을 설립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허나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운동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커우 공원 의거를 계획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낸 선서문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932 4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경축식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 의거를 감행,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킴으로써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하면 도시락 폭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윤봉길 의사가 의거 때 던진 폭탄은 '수통형 폭탄'이었습니다. 의거 전, 윤봉길 의사는 수통형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준비했습니다. 이 중 일제를 향해 던진 것은 수통형 폭탄이었으며, 남은 도시락 폭탄은 수통형 폭탄의 불발을 대비하고 또 다른 용도는 의거 직후 자결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사형선고를 받은 뒤 12 19일 사형집행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생을 마감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언 (출처: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 의사의 유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윤봉길, 그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모두가 가슴속에 되살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