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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앨버트 테일러, 푸른 눈 이방인의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앨버트 테일러,

푸른 눈 이방인의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광복(光復) 70년입니다. 빛 광(), 돌아올 복().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조국은 너무나도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빛을 되찾기까지,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까지 참 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노력한 푸른 눈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인 고종의 장례식과 3.1운동,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해 세계에 알린 인물입니다.

 

                                      

                                              ▲ 앨버트  테일러               메리 린리 테일러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 이방인의 서울회상(2009)’ 전시웹도록)

 

앨버트 테일러는 1896 22살의 나이로 금광 기술자인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따라 처음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다 독립하여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리따운 미국인 메리 린리를 만나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19 2 28일 앨버트의 아내는 첫 아이를 서울역 옆 세브란스 병원에서 낳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운명의 장난처럼 이 날은 일본에서 고종 황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날이었습니다

 

온 국민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을 마음 깊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외신에서도 고종의 승하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이에 대한 기사를 쓸 특파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앨버트는 UPI(미국의 통신사, 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전신인 UPA의 재한 기자가 되어 고종의 장례식 행렬과 이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냈습니다.

 

           

                              ▲ ()고종 장례식 행렬 모습

                                 ​ ()종로 2층 상가 건물에서 고종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바라보는 군중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 이방인의 서울회상(2009)’ 전시웹도록)

 

앨버트는 취재를 마치고, 자신의 아이와 첫 대면을 하기 위해 메리의 병실을 찾았습니다.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을 때, 침대에서 종이 뭉치가 떨어졌는데 놀랍게도 31독립선언서였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일본의 눈을 피해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었는데, 환자들의 침상에 몰래 숨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대한독립선언문                         

              ▲ ()이용설의 3.1운동 관련 증언 메모의 일부 (세브란스 병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환자들의 침상을 이용해

                     숨겼다고 하는 내용의 메모가 적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 이방인의 서울회상(2009)’ 전시웹도록)

          

앨버트는 이 문서의 가치를 깨닫고 미국으로 전신을 보냈습니다. 한국인들의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긴 평화 시위의 존재와 가치를 세계에 알리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일본군이 수촌리에서 민간학살 자행했다 소문을 듣고 동료와 함께 확인하러 가다가, 우연히 제암리 학살사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3ž1운동 때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만행, ‘제암리 학살 사건 취재해 일제의 비인간성을 전세계에 알렸으며, 일본총독을 찾아가 항의하여 학살 중단되기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앨버트 테일러는 1896년부터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할 때까지 46년 간 한국에 머물러 살았습니다그는 추방당해 미국에 터전을 새로 일구었는데그 곳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 전까지 줄곧 한국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했다고 합니다메리는 앨버트의 그리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1917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에서 경험한 일들을 적은 회고록 『호박목걸이』

 

사람들은 부르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하고 묻곤 했지만그럴 때마다 나는 그 친절한 친구들의 말에 질색을 했다자기 마음과는 정반대로 대답함으로써 커다란 갈망을 감추려 하는 브루스의 청개구리 기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니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대답하고는 상대방이 자기가 기대한 만큼 놀라지 않는 것 같으면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덧붙였다“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요메리가 납으로 된 작은 상자에 나를 담아 데려다 줄 때까지는 말이오.(호박목걸이, 70~71pp)

 

결국 그는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아버지의 묘소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세상을 떠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답니다

 

얼마 전앨버트 테일러의 첫 아들이 타계했습니다그는 "고향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남긴 후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하고한국을 위해 노력했던 푸른 눈 이방인.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은인이지만이제 그를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그의 아들까지 세상을 떠난 이 시점에서그와 맞닿아 있는 연결고리가 끊기기 전에 그의 자취들을 따라 걷고 감사함을 전하는 건 어떨까요?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