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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마지막까지 한국을 위했던, 민영환

마지막까지 한국을 위했던, 민영환

 

민영환은 민비(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뻘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가문의 배경과 민비, 황제의 신임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민영환은 우리 국민의 계몽을 위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적극 지지했고, 독립을 지기키 위해서는 의회를 개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 등을 생각해내었고, 말년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결 순국하여 생을 마감했습니다.

 

 

민영환 문관복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1887년 민영환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18958,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기까지 여러 관직에 머물렀습니다. 민영환이 주미전권대사가 되었을 즈음,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강화조약으로 요동반도 점령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러한 일제의 야욕을 좌절시켰으며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불러 일본세력을 견제하게 되었습니다. 민비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민영환은 이에 크게 분노를 느껴 관직을 포기하게 됩니다.

 

후에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가하게 된 민영환은 상해, 동경, 밴쿠버, 뉴욕, 런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까지 다니며 서양 문물과 선진적 제도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한 6개국 특명전권공사 등의 직책을 맡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국외의 문화 등을 수용했습니다. 여러 나라의 선진 문물을 보고 많은 것을 느낀 민영환은 귀국 후, 서구의 근대식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군사 제도 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천되지는 못하였고, 다만 군제 개편 건의만 채택되어 육군을 통솔하는 최고 기구인 원수부가 설치되었습니다.

 

 

1904 5월 민영환이 보낸 간찰 (출처: 독립기념관)

 

한편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후 같은 해 2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케 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습니다. 일제가 이 같은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민영환은 내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참정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 및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05 11 17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하였습니다. 민영환은 비분강개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어,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가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척결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민영환과 조병세는 재차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 밖에 엎드려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조약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일제는 일본 헌병을 출동시켜 백관들을 해산, 민영환과 조병세를 잡아 가두게 되었습니다.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1129일 해질 무렵 석방된 민영환은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하고 이제 남은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의 자결로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나라와 민족이 자유 독립을 회복하는데 초석이 되는 것뿐이라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민영환은 45세의 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민영환의 유서 [경고대한 2천만동포유서] (출처: 독립기념관)

민영환이 남긴 유서의 내용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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