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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어린이의 아버지, 소파 방정환선생

어린이의 아버지, 소파 방정환선생

 

 

소파 방정환선생 동상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 고 말씀하신 방정환 선생님

가정의 달이자 어린이날이 있는5, ‘1876년부터 광복 이전까지의 인물 소개를 개인미션으로 받았을 때, 방정환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올라 그 분의 흔적을 좇아 능동에 있는 서울어린이대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어린이대공원 숲 속 무대 뒤편 언덕에 방정환선생님의 동상이 있는데요, 책 속에서 봤던 그 동상이 숲 속 무대 계단 뒤에 세워진 것을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요. 그리고, 숙연한 마음으로 소파 방정환선생님 상 앞에 섰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어린이 잡지를 만드셨고, 연극, 이야기 잔치, 강연회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에 앞장 선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 분의 공적 중 하나지요.

 

 

 

 


방정환 선생은 1917천도교 3대 교주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과 결혼을 했고, 그의 사위가 되어 보성전문학교 (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할 수 밖에 없던 공부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방정환 선생은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경성청년구락부'를 만들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토론하기도 했고, 집에서 몰래 <독립신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어린이야말로 나라의 희망이자 미래임을 깨닫고 '인내천'을 가르치는 천도교 내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이러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1920 9,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에서 펴내는 잡지 <<개벽>>의 특파원이자, 도쿄의 천도교 청년회 담당자로 일본에 가게 됩니다. 도요대학에서 공부도 계속하였는데 이 때, 우리보다 서양 문화의 영향을 먼저 받은 일본에는 어린이를 위한 책이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의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운동 모임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색동회는 1923 5 1일을 제 1회 어린이날로 정했고, 방정환 선생은 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구연동화로 생생하게 들려주며 아이와 어른 모두 다 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방정환 선생님 덕분에 생겨난 말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부르는 말은 '녀석'이나 '' 같은 하대하는 말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아이를 대접하여 귀하게 부르는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어린이를 사랑하였던 방정환 선생님은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고, 지금까지 명실공히 '어린이의 아버지' 라 불리고 있습니다.

 

 

 

능동 어린이대공원에는 어린이헌장비가 두 개 있는데요, 하나는 1957 5 5일에 제정ㆍ선포된 어린이헌장비이고, 다른 하나는 1988 5 5일에 개정된 어린이헌장비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내용의 어린이헌장의 내용이지만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까지 그 밑거름을 주신 분, 방정환 선생님이 계셨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