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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수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필동 임면수 선생

수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필동 임면수 선생

 


19세기 혼란의 조선과 필동 임면수 선생의 탄생

 1870년대 조선은 격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안으로는 서양의 천주교가 민중들의 신념을 흔들었고 밖으로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도서와 해안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였던 1874,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에서 훗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 생애를 던질 필동 임면수가 태어났습니다. 향리에서 전통교육을 받던 임면수는 곧 개화기에 보급된 신문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돌연 서울로 상경하여 영어와 일어와 측량을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신문학을 수학했던 상동청년학원은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거쳤던 상동교회 소속의 교육원이었는데요, 이곳에서 임면수는 신문학을 수학하며 자연스레 민족정신을 고양하였습니다. 특히 상동교회 출신이자 독립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이동휘 선생의 영향을 받아 오직 계몽만이 나라발전의 진정한 길임을 깨닫게 되었죠.


 

필동 임면수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지도층이다.

(출처: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중계몽운동과 수원국채보상운동

수원으로 돌아온 임면수는 이하영, 나중석 등과 민중계몽운동으로서 삼일학교를 설립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간의 비판은 거셌습니다.


“망할 놈의 세상 신식 공부를 시킨다더니 모두 중대가릴 만들고 계집애들 언문을 가르친다더니 정강이를 다 내놓고 뛰게 하니... 쯧쯧


세인의 비난과 조롱에도 임면수는 민족의 계몽을 위해 묵묵히 일관하였고, 마침내 삼일학교를 세워 교감과 교장으로서 지역민들의 민족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중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삼일학교는 국어, 작문, 국사, 세계사, 지리 등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교육을 수원에 처음으로 도입한 신식학교로서 수원 계몽운동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1907 2월 대구의 서상돈은 당시 일본으로부터 짊어진 1,300만원의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는데요, 임면수는 이하영, 김태제 등과 함께 수원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국·한문 취지서를 자비로 발간하여 지역민의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재물을 가볍게 여긴다.”

 

임면수 등이 주도했던 수원 국채보상운동은 경기도로 확산되어 도내 국채보상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필동 임면수 선생(오른쪽 아래)(출처: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만주에서의 독립활동

1910,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의 명이 다했을 때, 필동 임면수는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 잃은 슬픔에 오래도록 젖어있기보다 즉시 민족독립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습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의 지시로 가족들과 함께 봉천성의 횡도촌으로 망명한 후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하던신흥무관학교의 운영 유지비와 군사훈련비 조달에 힘썼습니다.


또한 만주의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며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쓰고 한글, 한국사, 한국지리 등을 교육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였습니다.


 

삼일학교에 있는 필동 임면수 선생의 비석(출처: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체포, 고문, 마지막 독립운동

 그러나 1920 6 12일 임면수는 일본 경찰관 및 친일 조선인들을 암살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려는 혐의로 체포되어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임면수의 독립활동에 대한 열정은 그치지 않았고, 길림시에서 비밀리에 독립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 1921 2월 밀정으로 인해 또 다시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압송되었는데요, 그곳에서 끔찍한 고문으로 전신이 마비된 후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수원으로 돌아오지만 1930 11 29, 평양감옥에서 받았던 고문후유증으로 56세의 나이로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고 맙니다.


수원을 대표하는 20세기 전후 인물 둘을 꼽으라면, 자기에 충실하고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다가 삶이 산산이 부서져 여성해방의 모범이 된정월 나혜석, 잃어버린 나라 회복을 위해 모든 삶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된필동 임면수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면수 선생은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도층의 행동을 보여준 임면수 선생. 어쩌면 광복70년이 되는 지금이 다시 그를 기억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요?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