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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918년 미국의 23대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제약을 받는 일 없이 민족 스스로의 뜻에 따라 자신의 정치 조직이나 귀속문제를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3.1운동을 일으키고 전국으로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1919)

 

3.1 운동 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상하이뿐 아니라 러시아 등 각지에서 일어났고, 여러 곳에 퍼져있던 임시정부는 1919년에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 되었습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관제와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중심제를 지도체제로 채택,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초대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 1923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국내 조직과의 연계 활동과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지만, 일제의 탄압과 열강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에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으나 회의는 결렬되었습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많은 민족 운동가가 임시 정부에서 이탈하였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임시 정부는 1925년에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무령제로 전환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7년간의 행로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김구로 인해 활기를 되찾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세가 변하고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나 7년간 항저우, 난징 등으로 이동해야 했죠. 1940년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는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키워 항일전쟁을 준비하였지만 변변한 군사 작전 한 번 치르지 못하고 1945년 일본의 항복을 맞았습니다. 1945년에 일본이 항복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나라로 돌아오게 되지요.

 

 

독립운동가 양우조 선생의 일기

 

"아이가 훗날 이국을 떠돌면서 생활해야 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는 짧은 한 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것으로 독립 성취라는 간절한 우리의 소원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 달에는 한걸음기자단으로서임시정부 수립 후, 일본의 탄압과 강대 열강들의 외면 속에 7년간 나라 밖 이런저런 도시로 이동하며 독립을 이루기 위해 애쓰신 선열들의 발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모든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전시실에서 촬영하였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