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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광복70년, 가족 내에서 70년을 되찾다>나의 유일한 위인전

나의 유일한 위인전

 

"뻥이요 뻥!!" 할아버지께서는 뻥튀기 기계가 터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린 제 손을 이끌고 골목 한 쪽에 숨으셨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몇 시간이나 숨어 있다 간신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요.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대포 소리로 착각했던 것이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경험, 7번의 포로 생활, 그리고 1년의 투병. 전쟁의 후유증으로 마음은 곪아갔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가만히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는 7명의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할아버지의 모습 / () 2001년에 받은 국가유공자증서

 

할아버지께서는 17대째 살아온 양평에서 1928, 4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하신 할아버지는, 그의 그랬듯 배움보다는 생계를 위해 농부가 되셨습니다. 그러다 21살이 되던 1948, 할머니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머슴살이를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와중에도 차곡차곡 돈을 모아, 지금의 집이 위치한 곳에 초가집을 한 채 지으셨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전쟁이 터져 버렸습니다

 

 

   7명의 아이들이 편안하게 뛰놀 수 있는 집을 직접 지으신 할아버지

 

전쟁이 터지자 할아버지는 군인으로 입대하게 됐습니다. 총을 들고 전방에 나가 북한군과 대치를 하시고 그러는 동안 7번이나 포로로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면 할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 제게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포로로 붙잡혔던 기억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중 하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동료 3명과 함께 북한군에게 붙잡혔는데, 동료 중 한 명이 다리를 다쳐 이동이 힘든 상태였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이동이 힘든 동료를 숲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동료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반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생사의 위기를 헤쳐 가는 동안, 할머니 역시 홀로 고군분투하셨습니다북한군은 산 중턱에 위치한 집에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제 집인 마냥 집을 점령한 후,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생활했습니다. 할머니는 어린 딸과 갓난쟁이 아들을 업고 산에서 숨어 지내셨다고 합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음식을 구해 아이들을 먹이는 생활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아이를 잃고, 할아버지 또한 전쟁으로 크게 부상당하셔서 할머니는 살얼음을 걷는 듯한 나날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 초등학교 입학 전, 할아버지께서 함께 크라며 심어주신 유나 나무 / () 집에 홀로 남아 가족들의 흔적을 지키는 할머니          

전쟁 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네 부모님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셨지요.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으며 7남매라는 열매를 키우셨습니다. 전쟁이라는 삶의 상처와 굴곡들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2006년 돌아가신 후에도, 할머니는 홀로 집에 남아 파수꾼처럼 가족들의 역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방이 5개나 있음에도,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사진이 잔뜩 걸려 있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할머니이십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나도 고되고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에, 이런 게 어른이라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책에 이름 한 줄 나오시지는 않지만, 이분들이 진정한 영웅 아닐까요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