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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경운궁(덕수궁)을 폭파에서 지켜낸 해밀턴 딜

경운궁(덕수궁)을 폭파에서 지켜낸 해밀턴 딜

 

1.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1945년 광복 그리고 냉전체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연합국에 의해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냉전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2.신탁통치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소 공동위원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94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삼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반탁과 친탁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결국 경운궁(이하 덕수궁) 석조전에서 2차례의 회의 결과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간 속에 덕수궁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덕수궁 석조전(출처-공공누리)

 

3.1950 6.25전쟁 그리고 덕수궁의 위기

한국사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견뎌낸 덕수궁은 19세기에 이르러 존폐의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사령부는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서울로 진격했습니다. 인민군이 덕수궁에 머물며 숨어 있자 포교장교인 미국인 제임스 헤밀턴 딜 장군은 덕수궁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4.맥아더장군을 설득하는 제임스 헤밀턴 딜

 

 

2015년 덕수궁의 모습

 

맥아더장군으로부터 덕수궁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임스 헤밀턴 딜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덕수궁을 폭파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재가 전쟁으로 인해 폭파된다면 대한민국에 더 이상 문화재가 남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제임스 헤밀턴 딜은 덕수궁 폭격을 철회하고 인민군이 덕수궁을 다 빠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하였습니다.

 

덕수궁이 폭파명령으로부터 살아남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임스 혜밀턴 딜의 이런 결정은 덕수궁을 지켜내었고, 소중환 문화재인 덕수궁은 지금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제임스 해밀턴 딜의 <폭파위기의 덕수궁> -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