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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제대로 아는 것의 중요함, 박종철 열사

제대로 아는 것의 중요함, 박종철 열사

 

 

박종철 사진(출처: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1987 1 14, 하숙집에서 경찰들에 의해 갑작스레 끌려간 청년 박종철은 하루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아일보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도국 소속의 고용원이라는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의 시신 앞에서 졸도했다는 어머니의 참담한 마음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한 집안의 꿈이요 희망이었을 아들이, 어느날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있는걸 목격하는 육친의 설움에는, 또 이땅의 비극적 상황이 첨예하게 집약되어 있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박종철의 죽음은 군부 독재라는 1980년대의 비극이 빚어낸 것이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쿠데타로 1981년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정통성 부족이라는 콤플렉스에 내내 불안해하며 초조해했지요. 약한 자가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해 강한 척 하는 것처럼, 전두환 정권도 자신들의 취약성을 숨기기 위해 반기를 드는 세력들을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박종철이 구속되어 있을 때, 친누나에게 보낸 편지

 

박종철은 1964년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86 4 1일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에 가담했다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출소 후에도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타자기가 흔치 않던 시절에, 타이핑 능력이 매우 뛰어나 대학생 민주화운동에서 타이핑팀 팀장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 간첩을 조사하는 곳이나 실제로는 민주투사들의 고문에 사용되었던 남영 대공분실

() 박종철이 세상을 떠난 509호 고문실

 

전두환은 정권을 잡은 후, 정국안정을 위해 다양하게 당근과 채찍을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갈망은 잡초처럼 자꾸 자라났지요. 이는 박종철이 구속되었던 1986 4월 경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전두환은 국민들의 거센 대통령 직선 요구에 개헌을 논의해보자는 저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기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수배 조치를 내리는 사전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박종철의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인 박종운에게도 수배가 내려졌습니다. 경찰들은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박종철을 남영 대공분실로 불법 연행해 갔습니다. 박종철은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이었음에도, 물고문을 당하다 욕조에 목이 눌려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남영 대공분실 4층에 위치한 박종철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품들

 

그가 죽자 경찰들은 조용히 시신을 화장해 은폐하려고 했습니다그러나 한 중앙일보 기자가 박종철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공안부장이었던 최환이 화장을 막고 부검을 시킴으로써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이에 경찰은 다음날 "수사관이 수배된 박모군의 소재를 물으면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고 사망 원인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이 발표는 사건에 대한 논란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후 “’하고 치니 하고 죽었다는 말은 전두환 정권을 비꼬는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종철의 부검을 담당했던 의사들이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시민들이 폭발했습니다. 경찰은 사건을 잠재우기 위해 2명이 우발적으로 박종철을 죽였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를 뒤집어 쓸까봐 불안해 하던 두 경찰이 발표가 축소되었음을 교도관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이를 감옥에서 건네 들은 이부영이 비밀리에 사건의 전말을 적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에게 전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죽음으로 역사를 움직인 청년, 박종철.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규탄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마른 들판을 태우는 불길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 1987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