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걸음기자단 History

노벨상 후보로 손색이 없었던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노벨상 후보로 손색이 없었던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이번에 소개하려는 인물은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로 불리는 이휘소 박사입니다. 그를 소재로 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핵개발을 시도하다 의문사한 과학자로 알려졌지만, 제자와 지인들에 따르면 이휘소 박사는 핵개발과 상관 없는 이론 물리학자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핵개발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 이휘소 본인의 발언, 강주상 <이휘소평전> 발췌

 

이휘소 박사의 발언으로도 알듯이 이휘소 박사는 핵개발이나 핵무기에 관여한 물리학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www.kast.or.kr/hall/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참고)

 

이휘소 박사는 누구인가?

이휘소 박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입니다. 한국 이름은 이휘소, 미국 이름은 벤저민 리 또는 벤 리 입니다.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여 그 탐색에 공헌한 인물입니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 이 중 77편의 논문이 학술에 게재될 만큼 뛰어난 천재 물리학자입니다. 이분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핵무기 개발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였던 고려대 물리학과 강주상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이론은 1970년대 미국 대학생의 졸업논문에 핵폭탄 설계도가 실릴 정도로 공개가 될 만큼 당시 설계는 학부과정의 학생도 손쉽게 그릴 수 있었고 만약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면 원료가 되는 ‘농축우라늄’ 확보가 관건인데 이휘소 박사의 전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게 쪼개진 알갱이, 즉 소립자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공부하는 ‘고에너지 소립자물리학’입니다. 그러니 핵무기 개발을 도왔다는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http://www.kast.or.kr/hall/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참고)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입니다. 소립자들은 게이지 입자라 불리는 입자들을 공유하고 상호작용 하는데, 이때까지 이론만으로는 자연스럽게 질량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초이론을 이론값으로 계산하고 실험적으로 확인까지 가능 한 것이 하나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맵시 쿼크 질량의 예측, 질량의 범위를 예측하는 참 입자의 탐색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질량의 범위 입자를 탐색하는 방법을 통해 또 다른 입자의 존재를 발견된 것입니다. 이러한 입자 탐색이라는 것을 연구 결과로 발표 후 이론을 현상화 시킨 물리학자로 알려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유작은 ‘리-와인버그 경계’를 밝혀냈다는 것입니다. ‘리-와인버그 경계’란? 우리가 흔희들 말하는 암흑물질. 이 암흑물질의 질량의 경계를 계산했다는 것이 이휘소 박사의 마지막 유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물리학 분야 최고의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Phys. Rev. Lett.)’1977513일 접수, 1977725일에 제 39권의 네 번째 이슈에 실었으나 이휘소 박사는 그 해 616일에 교통사고로 숨져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의 그의 유작으로 되었던 것이지요.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대학교육용 기자재 및 실험시설 등을 지원하여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연구 진흥에 매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이휘소 박사가 살아 있었다면 노벨상 수상감이었다?!

 

 

(http://www.kast.or.kr/hall/ -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 참고)

 

“불의의 사고로 타계하신 고 이휘소 박사는 이(게이지) 이론의 완성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학자이며, 생존하셨더라면 당연히 노벨상을 공동수상 하셨을 분입니다. 전에 근무하던 프린스턴대학교 물리학과 3층 복도에는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을 10여 명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휘소 박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사진 속 이휘소 박사가 후학에게 따뜻한 격려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생 시절 폴리처와 두 번 공동 연구를 했고 서로 이름을 부르며 절친했던 서울대 이수종 교수의 회고입니다.

 

또한 그의 제자인 강주산 교수 또한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노벨상을 수상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강주상 박사의 말에 의하면 이휘소 박사가 노벨상 수상감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게이지 이론 연구를 수행했던 벨트만과 토프트가 1999년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이론의 논리체계를 확실히 한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수상자 대열에 포함되었어야 마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똑똑하고 천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가 아닌 인간 이휘소 박사의 평소 모습은?!

 

 

 (http://www.kast.or.kr/hall/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참고)

 

이휘소 박사를 기억하는 당시 사람들은 그를 ‘물리학에만 매달린 사람’, ‘가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그를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불렀다고도 합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는 생활습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지요.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연구실로 들어가서 이틀 만에 앉은 자리에서 한편의 논문을 완성했다고도 하니 정말 대단한 집중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좌우명은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하며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 였다고 합니다. 즉 단순히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문제보다 남이 알아낸 것을 뒤쫓는 게 아닌 본인 스스로 새로운 물리학의 화두를 제시하는 선구자적인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이론 물리학자, 노벨상 수상감 등 그의 수식어는 그를 대변하는 것처럼 이론 물리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겨두었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많은 한국계 물리학자들이 업적을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요.

 

그는 천재라는 수식어이기 전에 그의 학문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과 남이 아는 길을 가는 것보다 모르는 길을 통해 새로운 연구를 창출하는 능력 등 남들과 똑같은 길보다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간 그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