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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조국의 독립을 노래한 이육사

조국의 독립을 노래한 '이육사' 


 

  이육사(본명: 이원록)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15년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기까지 올곧은 삶의 자세로 나라를 위해 힘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 중 일제 말기의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독립의지를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을 희생하면서 문학에서도 큰 별이 된 사람, 시인 이육사를 소개합니다.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 이육사 선생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필명은 이활(李活)로 1904년 4월 4일(음력) 경복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용모는 청결하고 수수하며 선한 선비형으로, 신의와 의리가 강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학문을 배우며 다소 늦게 신학문을 접하게 되며, 끊임없는 학문과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습니다.


 이육사 선생의 생가 (출처: 독립기념관)


1925년 귀국한 이육사 선생은 의열단의 투쟁에 큰 감화를 받고, 형과 동생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본과 중국을 무대로 항일 활동을 펼치다 1927년 장진홍 의거(1927년 10월 28일 장진홍 의사가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발물 투척)에 연루되어 투옥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수인번호가 264였는데, 선생은 이를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지었다고 합니다.

 

1929년 출옥한 이육사 선생은 이듬해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 활동을 지속하며 베이징대학에 입학하여 독립운동 활동과 학문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육사 선생은 이전에도 시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하였지만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3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서 항일 운동을 하며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시 속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항일 정신을 담은 절명시, 「광야」

 

이육사 선생은 1941년 폐병을 앓아 요양을 하다 1943년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광복까지 약 1년 6개월을 앞둔 1944년 1월이었습니다.

 

이육사 선생은 생애를 통틀어 36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중, 절명시인 「광야」는 이육사 선생의 일생과 광복의 열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총 17회에 걸쳐 옥살이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꿈꾸었던 민족시인의 마지막 시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후 정부에서는 이육사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육사 선생의 절명시 「광야」를 읽어보고, 다시 한 번 광복 70년을 뜻깊게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