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몰아낸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
세계강대국 반열에 들어서있는 대한민국, 암울한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의 고속 경제 성장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며,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를 기록했습니다. 100달러에도 못 미쳤던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3만달러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현재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경제 발전의 단계가 이루어졌는데요, 오늘은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 ‘통일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960년대의 한국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6.25전쟁 이후 보릿고개를 겪으며, 국민들은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쌀밥을 멀리하고 잡곡밥을 먹지만, 당시만 해도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게 소원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품종의 벼를 개발하고자 했습니다. 본격적인 벼 품종개발은 1962년 ‘농촌진흥청’이 설립되면서 시작됐습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허문회 교수는 식량난의 해결책은 품종개량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생산성이 높은 벼 품종 개발을 계획했습니다. 이를 위해 1962년 필리핀에 설립된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에서 2년간 연구원으로 근무, 생산성이 높은 품종 개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해 잘 쓰러지지 않으면서 이삭 당 벼 알수가 많이 달리는 ‘통일벼’가 개발됐습니다. 통일벼는 1972년부터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우리나라의 쌀 자급을 성공시켰습니다. 통일벼는 당시 다른 품종들보다 30% 정도 생산성이 높은 다수확 품종이었고, 병해충에도 강한 특성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통일벼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1977년 600.5만 톤의 쌀을 생산했으며, 생산성은 현미 기준으로 ha당 5.31톤으로 세계 1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쌀의 자급률은 113%를 기록하여 안정적인 자급자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통일벼가 가져다 준 쌀의 자급자족은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일벼는 유전적으로 찰기가 부족하고 밥맛이 다소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쌀 생산량이 늘고 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밥맛이 더 좋은 쌀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통일형 벼 품종들의 재배면적은 차차 줄었습니다. 1992년에 이르러서는 농가에서 통일벼를 더 이상 심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통일벼는 추억속으로 사라졌지만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벼 육종사(史)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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