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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회영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회영

 

여러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만큼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특권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고 고귀한 신분일수록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인 마크 주커버그가 자신의 재산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는데요, 고대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정신을 우리나라에서도 실천하신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의 집안은 조선 대대로 고위 문무 관료를 수없이 배출한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당시 이 가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서울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부자였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1910 8월, 한일병합조약을 가제로 체결당하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그를 비롯 6형제와 가족 전체가 비밀리에 만주 지역으로 망명합니다. 그들은 조선에서 보장된 부귀 영화를 버리고 온갖 고난과 죽음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독립운동 위해 떠났습니다. 당시 이회영 선생의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던 땅을 모두 처분하여 마련한 독립운동 자금은 무려 40만원을 넘었다고 합니다.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약 600억원으로, 이 자금은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밀사’, ‘의열단등 국외 항일운동 전반에 사용되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 유품(출처: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재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했던 이회영 선생의 일가는 훗날 매우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자신들은 밥한끼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회영 선생의 6형제 중 4형제는 항일 운동 중 사망했으며, 이회영 선생 역시 말고자에 의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66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조선에 남아 대대손손 잘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이회영 선생과 그 형제들, 이회영 선생을 통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