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한 유일한 박사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

말은 바로 유한양행 창시자 유일한 박사가 말입니다.

 

여러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아시나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수준 높은 도덕적 의무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대기업의 횡포와 이기적으로 변모하는 사회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이러한 덕목을 가진 인사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오늘은 한국 역사에서 경영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를 알아볼까 합니다.

 

 

 

굴지로 키운 기업을 국가의 양분으로

 

유한양행의 창립 [출처 : 유일한 온라인 기념관 ]

 

 

1895년에 태어나 1905 9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유일한 박사.

31살에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1926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습 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유일한 박사가 제약업을 시작하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일한 박사는국민 건강을 지켜야 한다 신념 하나로 유한양행을 굴지의 제약회사로 키웠는데요, 박사는 기업 경영의 목표를 이윤 추구가 아닌 사회 환원을 내세워 투명한 경영과 성실한 납세를 실천했고, 결과 1968세금의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교육사업을 활발히 했던 유일한 박사 [출처 : 유일한 온라인 기념관 ]

                                                                 

 

 

유일한 박사의 기업 활동은 기업 활동 차제로써 교육 사업이며, 공익사업이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기술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중학교, 공업고등학교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유일한

 

 

한인소년병학교 훈련 모습 [출처 : 유일한 온라인 기념관 ]

 

기업가로 많이 알려진 유일한 박사의 독립운동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요!

유일한 박사는 기업가로서, 교육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 국가를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한 애국자였습니다. 청소년기 미국에서 한인 소년병학교에 자원입대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고, 대학생 시절엔 한인자유대회에서 한인 대표로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는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떠난 자리마저 청렴한 사회사업가

 

 

 

 

유일한 박사의 타계 [출처 : 유일한 온라인 기념관 ]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 사우 공제회, 보건장학회 교육뿐 아니라 사회원조사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는데요. 기관은 유한재단으로 명명되어 현재까지 공익사업을 활발하게 이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타계 자신의 개인 주식을 모두 재단으로 기부하며 재단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청렴한 사업가로, 불굴의 독립운동가로, 온화한 교육자로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바르게 살았던 유일한 박사.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았고 많은 사업가들에게멘토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지난 3 11일은 유일한 박사의 46주기였습니다. 여러분도 조국과 사회를 위해 살았던 유일한 박사의 삶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