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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근대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1. 최은희의 생애와 성장과정

최은희는 1904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성의 경제적·학문적 독립에 대한 생각을 딸인  최은희에게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상은 최은희가 훗날 여성운동가로서의 삶을 사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최은희는 경성여자보통여학교에 편입한 후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이었던 박희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두 차례 3·1운동에 참가하여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특사로 복권되어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2. 최은희, 최초의 여기자가 되다

최은희는 일본 유학중 방학을 맞아 192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광수의 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 방문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산부인과 의사였던 이광수의 아내 허영숙은 자신이 일 해준 부잣집의 출산경비를 받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최은희가 이를 알고 그 집에 직접 찾아가 그 돈을 받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이광수는 최은희의 배포와 끈기를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전부터 최은희와 자신의 아내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통해 최은희의 뛰어난 글 솜씨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조선일보에 기자로서 추천했습니다. 3·1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통치전략이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신문 발간이 허용됨에 따라 창간된 조선일보는 변화를 위해 여성 기자를 등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알맞은 기회를 접한 최은희는 1924105일 조선일보의 첫 여기자이자 우리 역사상 민간신문의 첫 여기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 여성운동가와 민족해방가로서의 삶


조선일보 편집국에서(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최은희는 기자가 된 후 ‘부인견학단’을 조직하고 신문에 [가정란]을 신설하는 등 여성들의 사회화와 여성계몽을 위한 많은 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최은희는 민족의 해방이 있어야 여성의 해방이 있다고 믿으며 여성의 단결을 민족해방의 촉진제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신념으로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창립에 참여하여 여성의 해방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4. 광복 이후의 삶

광복 이후에도 최은희는 여전히 여성의 권리를 위해 다양한 단체에 참여하고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때까지 유명무실했던 ‘한국의 어머니날’을 제안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항쟁역사를 담은 『조국을 찾기까지』를 비롯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겨 여성사 연구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1983년 최은희는 병상에서 여기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조선일보사에 5000만원을 기탁하였습니다. 1984816일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유언에 따라 조선일보는 ‘최은희여기자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훌륭한 여기자를 선정, 수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