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이란?
화폐개혁(currency reform)은 정책적 혹은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존 화폐의 유통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는 조치를 의미합니다. 오늘은 그 중 정확히 54년 전 오늘 일어난 1962년 화폐개혁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진행과정
1962년의 화폐개혁은 재정 적자 해소와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됐습니다. 1960년대 초반은 자립경제 확립이 시급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위해 적극적인 자금조달책이 필요했던 당시 박정희 정부는 성장 중심의 강력한 경제운용계획을 공표하게 됩니다. 이것이 1962년 발표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이 계획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화신용 및 외환정책 등에서도 각종 지원책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와 긴급금융조치를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긴급통화조치에서는 환(圜)표시의 화폐를 원(圓)표시로 변경(10환→1원)하고 환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였습니다. 또한 구권과 구권으로 표시된 각종 지급수단을 6월 17일까지 금융기관에 예입하도록 하였고 후속조치로는 금융기관의 신규예금은 물론 기존예금에 대해서도 봉쇄계정에 동결하도록 했습니다.
<1962년 당시 발행된 1원, 10원, 100원(출처:한국은행)>
이러한 화폐개혁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재무장관 천병규를 비롯한 5명의 화폐개혁 준비반은 “기밀 누설 시 총살형도 감수한다”는 선서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화폐개혁에 사용될 새 화폐는 영국에서 제작되어 개혁이 시행되기 44일전 부산항에 도착, 폭발성 화학물질로 위장된 채 철저한 보안 아래에 보관되었습니다. 한국은행 총재도 몰랐을 정도로 극비리로 진행된 이 개혁은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생활비에 한해 6월17일까지 10대1의 비율에 따라서 가구당 한 사람에게 5백 원 한도로 새 은행권을 바꿔준다고 했지만 충분치 않은 한도로 사회적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날은 통금 시간까지 앞당겨져서 귀가하는 시민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택시 기사가 구권은 이제 소용없다면서 승차거부를 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포목상과 쌀집은 늦은 밤에도 현금을 들고 와 치마 저고릿감을 사거나 쌀을 사려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화폐교환을 위해 은행 앞에 줄서있는 사람들(출처 : 국가기록원>
실패로 돌아간 화폐개혁
화폐개혁이 단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돈이 없는 서민들은 술에 취해 '알게 뭐냐'고 외치기도 했으며, 지방에 있는 가족에게 화폐개혁을 알리고 빨리 신고하라는 전화를 하는 사람이 많아 전화 교환양은 '눈코 뜰 사이가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등의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화폐개혁 발표 이후 버스와 택시에 승차거부로 당혹스러워하는 시민들(출처 : 아이엠피터(http://theimpeter.com/)>
이 외에도 재계와 미국의 강력한 반발, 예상보다 적은 음성자금의 규모에 직면하며, 박정희 정부의 통화개혁은 예금동결 조치를 단계적으로 해제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군사정부가 급작스럽게 시작한 화폐개혁은 대한민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면서 그냥 밀고 나가면 할 수 있다는 군사문화의 전형적인 정책과정을 보여주며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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