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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청년들

 

시 쓰는 것을 좋아하는 청년 윤동주, 그리고 동주와 삶과 죽음을 함께한 평생의 벗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삶은 담은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영화 <동주>입니다. 영화<동주>는 문학을 사랑한 이들의 일제강점기 삶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았죠.



< 영화 동주, [출처] 네이버 영화 >

 

대표적인 예로 일본이일본과 조선은 이라는 내선일체 구호 아래조선인들에게 강요한 창씨개명을 있습니다. 시인을 꿈꾸던 윤동주는 타의적으로 히라누마;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개명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고 해요. 이를 보여주는 시가 바로 윤동주의 '참회록'이인데요. 창씨개명 이후 작성한 윤동주의 참회록에는 일본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반성과 괴로움이 담겨있습니다.



참회록(懺悔錄)

 

윤동주 / 시인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滿)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출처] 윤동주 - 참회록(懺悔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를 괴롭게 만든 창씨개명은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죠. 창씨개명이란 일제가 황민화 정책의 하나로, 우리나라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입니다. 창씨개명은 경찰서·지방행정기관의 독려·감시 하에 강행되었으며 여기에 친일단체들이 독려강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 아래 정해진 기한까지 창씨를 한 가구는 약 80% 정도 되었습니다. 할머님들 성함 중 끝이 ‘자’로 끝나는 분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의 창씨개명의 영향을 받은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여성들이 ‘꼬()’자로 끝나는 이름이 많아, 이를 따라 지었기 때문입니다.




< 창씨개명을 하는 사람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


그렇다면 왜 일본은 창씨개명과 같은 내선일체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한 것일까요?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식민지인 조선의 사람들과 모든 자원을 전쟁 도구로 이용했고, 이 시기 일본은 우리 민족을 완전히 일본인으로 만드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한 것이죠. 우리말과 글의 사용은 물론 우리 역사의 연구와 교육을 금지하며, 한마디로 조선이라는 나라와 민족은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한국 이름을 없애는 창씨개명인 것입니다.



< 한용운 선생, [출처] 공유마당 >

 

하지만 일본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은 물론 일본의 내선일체를 거부한 독립운동가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님의 침묵’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용운 선생이 있는데요. 한용운 선생은 최후의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속 황민화정책에서도 민족 정기를 꺾지 않았고, 1940년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독립 운동가의 행동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조선의 고유한 이름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분들을 돌이켜보며, 고마움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